하이네켄
-RU
“여기 예쁘지? 가게 이름이 ‘NOW’야.”
“마음에 들어.”
밖에 나오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며칠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는 Z는 헬쑥해진 얼굴로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몸도 별로 안 좋고 밥도 먹었으니, 이제 집에 갈래.”
“오랜만인데 밥만 먹고 땡이야?”
“어, 밥 사준다고 해서 나왔잖아.”
“넌 여전히 정이 안 든다. 그럼 거기가자.”
“아, 정말 거기?”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고 어색한 표정의 Y가 Z와 눈을 마주쳤다. Z는 되묻더니 대답도 않고 걸음을 뗀다.
Z는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우는 것 같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취기가 올라 볼과 코가 빨갛다. 고개를 들고 앞에 앉은 Y를 잠깐 응시하더니 또 킥킥 웃는다. 못 참겠는지 다시 테이블에 엎어져 어깨를 들썩였다.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른 듯 벌써 5번째 이 행동을 반복하자,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Y도 웃긴 생각이 들었다. Y는 입 끝에 잔뜩 힘을 주고 웃음을 참았다.
“Z 취했어.”
“어, 취했어. 크큭”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Z가 웅얼댔다.
“기분 괜찮아?”
“어, 최고야.크큭.”
“...”
“킬킬킬...킥킥..”
Y는 더 할 말도 없다 싶어서 실없이 웃고 있는 Z의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Y가 생각하기에 Z는 분명 Y와 함께 있지만 Y와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다. 울음 대신에 웃음을 터뜨렸는지, 정말 무언가 참을 수 없이 웃긴 기억을 떠올렸는지 알 수 없다. 술 때문에 그가 무척 들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오늘 Z는 평소의 Z답지 않다. 그는 늘 무표정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Y는 Z가 숨겼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늘 강한 척, 슬프거나 외롭지 않은 척을 했다. 심지어 마음껏 웃지도 못하던 그 였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웃기를 멈추고,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가만히 있다.
“술 깨면 기억 못 할 거잖아. 나도 심하게 취해서 기억 못해.”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왜 안도감을 느끼는 거야. 쳇.”
여전히 테이블에 엎어져 Z는 혼잣말 하듯 투덜댔다.
“그럼 술 마시지 않는 날도 자신의 감정에 더 솔직해 지는 건 어때?”
Y의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Z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잠깐 비틀거리며 서 있더니 힘없이 주저 앉아서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Y를 마주보았다.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지?”
“그래, 그날도 Z가 이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
“작년 이맘때 쯤, Y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어.”
“응, Z의 옛날 애인.”
“옛날이 아니잖아.”
“헤어지면 옛날이야. Z는 차인거고.”
“하지만 내가 마음에서 보내주지 않았잖아.”
“그래, 어느 날 돌아올지도 모르지.”
“응.”
“안 돌아올걸?”
“그 아이 잘 지내?”
“어, 잘 지내. 잠깐 만났다면서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A가 잘 지낸다는 말에 Z의 표정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A가 자신 없이 행복하다는 것이 섭섭하면서도 , 그녀의 불행을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Z는 갑자기 생각난 말을 하듯 화두를 돌렸다.
“너 오늘 진짜 예쁘다.”
“그렇다고 나한테 키스 할 건 아니잖아.”
“응.”
“네가 외롭고, 내가 예뻐도 소용없네.”
“응.”
“뭐가 ‘응’이야. 나한텐 손톱만큼도 감정이 안 생겨?”
“옷 벗고 오면 생길지도?”
“변태 저질이야.”
“벗고 덤비는 여자 있었는데 별루더라.”
“그래, 너 같은 남자에게 섹스는 사랑의 옵션일 뿐이지. 히히히”
Z는 다시 테이블에 엎어져 잠든 것처럼 조용해졌다. Y는 손에 들고 마시던 반쯤 남은 병을 내려놓고 Z가 마신 빈 병에 손끝을 댔다. 병 앞에서 손을 움직이자 매끄러운 표면에 그림자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비쳤다. 신기한 물건처럼 꼼꼼히 살펴보며 손으로 만졌다. Y는 Z가 지금 손끝에 닿는 투명한 유리병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차갑고 단정한 사람 사람이다. 그가 품은 생각들이 Y를 취하게 한다. 그의 속은 빤히 보이지만, 초록색의 하이네켄 병처럼 품은 색깔은 알 수 없다. 그를 느낄 수 있지만 알 수 없다. 이번에는 Y가 소리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Z를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6개월 전 이었다. Y는 문을 박차고 들어와 넓지도 않은 실내를 꼼꼼히 돌아보더니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우와 2년만이죠. 딱 2년 채우고 귀국했어요. A랑 미오랑 곰이 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안 왔네.”
“아, A는 왔었는데,”
주인이 가게 한 귀퉁이로 눈짓을 했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 단숨에 Y쪽으로 왔다.
“A 만나러 왔어요? A 친구세요?”
낯선 남자가 다그쳐 묻자, 당황한 Y는 대답을 못 하고 난처한 표정의 주인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꽤 마셨는지 볼과 코가 빨갛게 된 남자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안녕하세요. Z라고 합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오늘 A 만나기로 했나요?”
“네... 그런데 제가 1시간이나 늦었네요.”
“저 때문에 일찍 돌아갔어요. A와 헤어졌는데 제가 무작정 여기까지 따라 왔어요.”
A와 무척 친했지만 Y는 A에게 이런 인상의 남자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Z는 그간 A가 만났던 남자들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외모가 무척 중요한 A의 기준에 비해 세련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입담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A에게 전화를 했다.
“돈 많아 보여서 두 주 정도 만났더니, 좀 질척거려. 왜? 마음에 들어?”
“아니, 지금 딱 두 마디 나눴어. 네 이름만 듣고도 허둥지둥 하는 게 좀 안됐더라.”
“이 A님이 인기가 좀 많잖아.”
“그나저나 어디야? 다들 집에 간 거야? 비행기 연착되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하고도 발이 안 보이게 뛰어왔는데 왜 아무도 없어.”
“곰이랑 미오는 갑자기 일이 있어서 지방 갔어.”
“너는?”
“기분이 별로라서 아는 오빠 좀 만났는데, 더 별로다. 밥 거의 다 먹었으니까 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 할게 .”
전화를 마치고 바에 돌아오니, Z는 여전히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펜으로 무언가 끼적이고 있었다. Z는 펜을 든 손이 좋다. 지난 사랑을 못 잊어 그리워하며 펜을 드는 낭만적인 남자일까 생각하며 취한 듯이 잠시 그를 응시했다. 술은 한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똑바로 걸어갔다. Y는 Z를 지금 처음 만난 사람처럼 앞자리에 앉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Z씨. 많이 취하신거 같은데 무얼 적으세요?”
취한 Z가 싱긋 웃으며 노트를 내밀었다. 전문가는 아니고 취미삼아서 제법 잘 그린 강아지였다. A의 얼굴이나, 그리움이 담긴 시 같은걸 끼적거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귀엽다 싶었다. 아까보다 더 취한 Z가 천천히 약간 말을 더듬었다.
“취했으니까 하는 말인데, 전 우울하면 개나 고양이를 그려요. 흔히 볼 수 없는 동물원의 동물들이 더 눈길을 끌지만, 마음은 흔한 것에 더 편안해져요. 저는 소박한 것들을 좋아해요. A는 화려하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죠. 그 자리에 제가 아주 깊이 사랑했던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만 보내 주어야 겠다고 생각 했어요.”
“제 전화번호에요. 내일 술 깨고, 혹시 개 말고 강아지가 그리고 싶어지면 전화해요. A의 친구입니다.”
Z가 그린 그림아래 전화번호와 방금 한 말을 그대로 적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며칠 후 Z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몇 마디도 안 되는 Y와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Y는 너스레를 떨며 Z가 말실수를 많이 했으니 밥을 사라고 했다.
테이블에서 부스스 고개를 든 Z가 예의 취하면 짓는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무슨 생각해?”
“Z는 사자가 아니라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생각.”
“응.”
“여긴 A에게 이별을 통보 받은 곳이기도 하고, Y에게 고백 받은 곳이기도 하지?”
“응.”
“대답 말고 말 좀 해봐.”
“이상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Y가 다 하는 것 같아.”
“취해서 기억 못하니까 나한테 키스 하는 건 어때?”
“응. 별로야.”
Y는 웃으며 Z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Y는 Z의 아픈 사랑이 지나면 Y에게 익숙하고 따뜻한 사랑이 찾아 올 것 이라고 생각 했다. 사랑에 빠진 Z가 사랑스러웠다.
“내가 언제부터인가 A를 떠올리지 않는 게 참을 수 없게 웃겨. A의 친구인 Y는 사자 같이 당돌하고 화려한 여자지만, 자라지 않는 아기사자 같아. 내일, 술 깨고 혹시 강아지 말고 개 키워 보고 싶으면 전화해.”
다음날 Y의 지갑 속에 귀여운 아기 사자 그림과 짧은 메모가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손잡고 지치도록 걷고 싶어.”
“응”
“대답만 할거야?”
“‘NOW’에서 저녁 먹고, 카페에 갔으면 좋겠어.”
“취하지 않아도 Y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어?.”
“응.”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주점에서 들고 온 하이네켄 병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아 쓴 글.
2010.10.19 07:20 AM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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