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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영화를 보다가 울어 봤는가. 영화에 지나치게 몰입했기 때문이거나 영화의 어떤 부분이 당신의 기억일부와 뒤섞여서 그러한 감정을 끌어 왔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창피하게도 성인용 코미디 영화를 보다가 울었다. 성적인 판타지를 꿈꾸며 그들은 엇갈리고 다투고 오해한다. 나는 그들이 꿈꾸는 판타지가 비단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이 영화는 모두 해피엔딩을 맞지만, 우리의 현실은 아마 자혜가 달려가다 넘어지는 장면에서, 장배가 지수와 다투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순심과 기봉이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에서 멈추어 버리기도 한다. 죽기 전에 인생에 끝이 있다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린, 이대로 끝일까... 라고 생각하며 천진하게 매달리지도 열정적이지도 못했던 것에 또 미련을 둔다. 단숨에 돌아서거나 이제 그만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간은 짧지만, 곪거나 부패할 만큼 마음이 오래되었다. 돌아서서 천천히 걷는다. =====
내심 화끈한 정사신과 노출신을 기대하며 영화표를 샀는데, 오히려 기대했던 면에 있어서는 꽤나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전무하다.) 대신에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제목처럼 떠들썩하게 한바탕 축제를 열어 구경한 기분이다. 섹시코미디라고 장르구분을 해 놓은 만큼 성적인 이야기를 웃기게 풀어 놨다.
일단 주인공들이 모두 삼류 에로영화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농담처럼 ‘변태감성에 마음껏 빠지는 영화’라고 소개를 했다. 하지만 엄연히 그저 ‘야동’이 아닌 스토리가 있는 영화이고 익살스러움의 이면에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나름의 메시지도 있다. 우리들이 쉽게 성적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아주 가깝고 친근한 이웃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묻는다. “건전하고 바른 것은 무엇이냐”라고.
누군가 ‘숏버스’(2006, 존 캐이먼 미첼) 같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그보다 폼은 덜 나지만 훨씬 재미있고 솔직한 영화라고 소개할 것이다. 오페라극장에 가는 게 아니라 동네 아줌마들 수다를 엿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쓰는 ‘변태’라는 단어의 저변에는 혐오감이나 저속함을 깔고 있는데, 이 영화는 ‘변태’들의 축제이다. 이해하기 힘든 불편한 주인공에 저질이라고 치부했던 통속적인 이야기를 한다. 이런 것을 마음껏 꺼내 들 수 있는 것이 코미디 영화 나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실컷 저속하게 웃고 나서, 고상한 척 에둘러보자면 ‘개인들의 취향’을 이야기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2010.11.22 AM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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