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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0일 수요일

My Blueberry Nights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My Blueberry Nights, 2007, 왕가위)

제법 괜찮았음에도 혹평을 받았던 영화 "my blueberry nights“를 또 보았다. 사람들은 왕가위 감독이 헐리우드에 가서 본인의 아류같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대단한 전작들과 비교해 퇴행했다는 평가였다. 유명한 감독과 역시 유명한 배우의 만남이라 기대가 컷 던 것도 한몫했다. 절절한 이야깃거리에 목말랐다면 난데없이 한 대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할 것이다. 큰 맥락을 놓고 보자면 무척 진부하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이 이별에 아파하다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돌아오니 잠깐 마주쳤던 남주인공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하이틴 드라마도 아니고, 40줄을 바라보는 주드로와 20 후반의 로라존스를 데려다 놓고 이런류의 ‘사랑’이 가당키나 한가 항변 할만하다. 심지어 두 주연 배우의 사랑은 영화에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예쁜 액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 그 틀 안의 사진은 또 어떠한가. 애증으로 얽힌 어니 라든가 레슬리의 이야기 역시 완전히 새로운 게 아니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너무나 쉬운 전개가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철부지처럼 훌쩍 떠날 수 있고, 비장한 사랑의 결말은 죽음이며, 사랑은 떠나보낸 후에야 알게 된다는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교훈을 남기고 영화는 끝나고 만다.


그러니까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돌려보게 되는 건 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왕가위는 그렇게 현실적이지도, 그렇다고 허구적이지도 않은 공간을 만들어 놓고 이별이라는 단어를 꺼내 놓는다. 열쇠들이 사연을 간직하고도 남겨진 것처럼 ,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버려지는 블루베리 파이처럼 우리는 우연과 필연의 연속 안에 살고 있다. 제레미(주드로)는 주연이지만 그저 들어 주는 사람이다. 엘리자베스(로라존스) 역시 주연이지만 다른 이들의 사랑을 관조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중에도 열쇠의 개수만큼 많은 이야기 중에 한 두 개쯤 내 이야기를 끼어 넣을 틈이 충분하다. 나의 블루베리 (맛, 색, 그런 성질) 이었던 밤은 입술로 스며들었다. 단어로 표현하자면 공감각 같은 것이다. 세련된 화면의 색감과 음악 그리고 도시적 우울, 감성주의를 빼고 이 영화를 말할 수 없다. "the greatest"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슬쩍 애잔한 기분이 되어 카페 한쪽을 응시하게 된다. 그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다 그렇고 그렇지. 그런데 이 순간만은 혼자 견딜 수 없겠어. 외로움이나 두려움 따위와 비슷하지만 , 무언지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말이다. 그런 순간들을 지나서 달콤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영화는 끝이 난다.

젊고 예쁜 영화가 되었다.


아.. 뭐라할까.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세기말의 신년 음악회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 쥬세페 토르나토레, 1998 )


  전설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기억되는 사람이나 그 행위를 말한다. 신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화와 다르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 ‘아메리칸 드림’의 정점에 서 있는 한 피아니스트의 삶을 그린다. 그는 출생기록도 사망기록도 없는 인물로,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마치 전설처럼 그의 친구 맥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데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1900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처럼 영화는 그때 그 시대가 꿈꾸었던 ‘드림’이 무엇이었다고 정의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꿈들이 너무나 컸고, 아름다웠으며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고 한다. 세기말인 1998년 개봉한 이 영화에서 반은 좌절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맥의 이야기고 , 그 반은 희망에 벅찼던 그때를 현재형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세기말에 듣는 신년음악회’라고 이름 지어 본다.


  이 이야기는 처음 아메리카를 보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배는 왕복선인데 미국행 배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영화에서 거의 나오지 않지만 20세기의 시작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경제 대공항으로 이어진다. 미국은 오히려 전쟁의 수혜를 입었지만 급격한 경제성장에서 오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품고 있었다. 역사는 유럽의 좌절이 낳은 아메리카 드림 역시 허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때의 사람들은 아메리카를 꿈꾸었다. 맥은 여러 번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배에서 내리자고 권한다. 하지만 그는 그 꿈에 편승하지 않고 관조자로서 생을 마감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1등실 피아노 위에서 발견된 아이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다.” 는 내용이었다. 그 재능은 대단해서 배에서 내릴 수 있게 해줬고, 배에서 내리더라도 성공한 삶이 예견되었다. 그 것은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타고난 것이다. 그리고 두 번 째 이 영화를 봤을 때 비로소 운명이란 단어를 한 번 더 되새겨 보게 되었다. 그는 재능이란 행운을 타고났지만 그것을 빼고 나면 운명은 가혹하기까지 하다. 석탄실의 흑인 노동자였던 데니 부드맨은 1900년의 첫날 TD라는 상표의 레몬박스에 담긴 아기를 줍게 된다. 이러한 사연은 고스란히 그의 이름이며 넘을 수 없는 굴레가 된다. 미국의 흑인은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가난했고, 문맹률도 높았다. 데니는 아이를 뺏길까봐 숨겨 두고 키운다. 1등실 피아노 위에 아이를 버렸던 부모의 바람은 이루어 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가 6살에 데니가 불의 사고를 당해 다시 고아가 된다. 출생기록도 없으며 배가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는 평생을 그곳에서 산다. 그에게 석탄실에서 자라게 된 것과 1등실 피아노 앞에 앉게 된 것은 똑같이 그저 주어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 석탄실에서 그가 1등실로 나왔을 때, 규칙 위반이란 말은 참 인상적이다. 그는 배 위 어디에서나 피아노를 연주한다.


  어느 날 재즈의 창시자라 불릴 만큼 큰 성공을 이룬 제리는 겨루기 위해 나인틴 헌드레드를 찾아온다. 그는 감격적으로 음악을 감상하지만 제리는 그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 한다. 이것이 도시이며 육지로 표현되는 그들의 방식인 것이다. 재즈란 본래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감성을 중시하는 흑인의 음악이다. 세련되고 감성적인 음악을 체득한 제리의 음악은 예술 그 자체였지만 천재적인 나인틴 헌드레드와 비견할 수 없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개인의 의지나 노력 따위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 시대적 조류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배에서 내리지 못한 이유는 은유적인 대사로 표현하지만 이러한 총체적인 절망을 안고 있다. 내게 이 영화의 가장 클라이막스라면 단연 그의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었다. 그가 천국에 가서 폭발 때문에 한 팔을 잃었다고 한다. 남은 게 오른 팔 뿐이라 그걸 받게 되면, 없는 것 보다 낫겠지만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을 것이란다. 그래도 그는 배에 남는다.


  시대를 빼고 말할 수 없는 영화라 어둡고 쓸쓸한 내용으로 리뷰를 썼지만, 사실 절반은 천진하고 명랑한 피아노곡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데니는 아이가 없는 어른이 가는 곳이 고아원이라고 한다. 한 농부는 세상 끝에서 바다가 삶은 무한하다고 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분절되어 희망만을 가득 싣고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나인틴 헌드레드의 모든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의 삶만을 떼어 놓고 보면 마치 신년음악회처럼 벅차고 감동적인 선율을 가지고 있다. 소녀와 시작뿐이었던 사랑은 동화 같다.







2012년 4월 3일 화요일

혼자 떠나는 여행 (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

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 김춘미 역, 문학사상 2010,


혼자 떠나는 여행



소년 다무라 카프카, 그가 떠난 여행 이야기이다. 그의 여행은 현실적으로 불가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현실의 영역으로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새로운 경험의 추가에 따라,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변화의 경계’에 서게 된다. 여행이란 곧 그 수많은 경계를 넘어서서 변화 되어가는 자신을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15살 이라는 나이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라는 점에서 많은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작가 후기에 적혀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주인공은 소년 답지 않게 강인한 자아를 가졌고, 언제나 분명하고 뚜렷한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는 소년이라기보다 작가의 연륜에 부합한 경험과 사리판별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지나치게 침착하고, 한 경계를 넘으며 당면하는 문제들에 좌절하거나 놀라워하지 않으며 해결책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소년답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 문제 될 것은 없다. 다 자란 어른들도 모두 평생 ‘성장통’에 시달리기 마련이니까. 오히려 나약하지 않은 길라잡이를 세우고 떠나 알찬 여행을 즐겼는지 모른다.



운명이란 불가항력의 굴레를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서 재편성해 나갈 것인가. 다무라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저주와도 같은 예언,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하나씩 자신의 삶에서 진행 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 전반은 그가 비극으로 이름 지어진 운명을 어떻게 재구성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결말 -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 다무라가 선택한 길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공백이 되는 것이었다. 순응하여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과거에만 머무는 사에키와 현재만을 살아가는 나카타 노인의 괴상한 분절점에서 다무라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초반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중반에는 이상한 상징들을 늘어놓는 작가 의도에 대한 의구심으로, 결말은 그야말로 그 모든 것에 대한 해소, 상쾌한 기분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그 여운을 가지고 아직 가끔 한 두 장씩 팔랑팔랑~



이 여행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것은 여러 가지 잡다한 서정적 감성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알뜰살뜰히 해변과 숲이 있는 풍경화의 퍼즐 조각들을 모으게 된다. 뭐니뭐니해도 여행은 볼거리가 있어야 하지.) 또한 ‘내려놓음’의 미학을 배웠다. 버리지 못한 것들을 짊어지고 힘겨웠던 나는 하나씩 하나씩 두고 나아감으로 일단 하루키 여행의 막장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내 이야기를 쓰기위해 ‘모든 것’이 아닌 ‘그 일부’만을 선택하여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다. ........ 그리고 이 여행은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소설 속에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강인한 ‘자아’가 있다. 다무라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조금씩 나아진다. 적어도 내가 볼 땐 그렇다. 나도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소녀들의 심리학

소녀들의 심리학

레이철 시먼스지음 /정연희 옮김
양철북, 2011.02


그들은 어떻게 친구가 되고 왜 등을 돌리는가 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제목에 ‘소녀’라는 단어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낭만적인 내용이 아니다. 상담을 통해 수집한 집단따돌림이나 대체공격에 대한 사례를 매우 다양하게 제시하고 가시적인 폭력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평화로운 것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오히려 가장한 평화가 개개인을 어떤 심리적인 상처로 이끌며 문제를 심화시키는지 보여주고 있다. 사례를 중심으로 써서 필요 이상으로 글이 길어지는 느낌도 받았지만, 적절한 분석도 덧붙였기 때문에 읽어볼만하다. 연구 집단을 ‘소녀들’로 한정했지만 나는 범위를 확장해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저자 레이철 시먼스에 따르면 관계적이며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이란 일시적으로 물리적인 것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게다가 관계의 상실이나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해자 자신이 곧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싸움의 가담자도, 양상도 모호하게 된다. 진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조종하고, 피상적인 인기만을 쫓게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의 하위 운동에는 관계와 접촉, 양육과 배려를 높이 평가하는 특성 때문에 여성이 사회에 특유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하지만 인기는 이 현상을 뒤집어 생각하게 한다. 인기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소녀들은 우정을 끊임없는 협상과 계산 활동으로 전환되고, 관계는 형성되는 것만큼 파괴된다. 관계는 이제 단순히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기도 하다.p237]
그녀는 여성이 사회화에서 공격을 표출할 올바른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표출하지 않는 법만을 배우게 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한다. 질투, 경쟁, 분노 같은 강렬한 감정도 털어놓고, 자신에게 더 솔직해 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상처는 세월이 한참 지나도 여전히 생생하고 어리둥절하다. 이들은 왜 주변 사람들이, 가까운 친구들이 분노를 간접적으로, 더러는 경고도 없이 표출해서 그들을 망연히 혼자 자기비난에 빠지게 하는지 묻는다. 중략, 소녀들의 감정 전부를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가 되면 그들도 솔직한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p.373]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통신의 발달로, 관계중독에 빠지거나 말 한마디가 때론 굉장한 파급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현대인들이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기계발서는 아니지만, 고통을 정당화하는 문화 속에서 올바른 관계를 선택하고 학대적인 관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비문학은 후기쓰기 어렵네요. 하하.)

2012년 2월 6일 월요일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문학과 지성사,2003 )


-김경욱



재미있는 책을 가지고 모이자,라는 제안에 약간 고민을 했다. 절망에서 끌어내준 책도 있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준 구절도 많은데 어떤 게 좋을까. 책장을 둘러보다 피식 웃음이 나는 책이 있었다. 짙은 파랑색 표지의 김경욱 단편소설집이다. 낙서도 많이 하고 가끔 찾게 되는 환타, 불량식품 같은 별칭으로 부르며 하대했었다. 생각해보니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다. 보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따금 좋을 때도 있어서 돌아보게 된다고 해야겠다.



우연한 기회에 내용을 미리 듣고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이라면 사색적이고 목가적인 화자가 등장해서 현실자체 보다 미화된 그림을 그리는 편을 좋아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기대했던 바와 정반대의 책이었다. 죽음, 자살, 허무주의, 익명성, 사랑 없는 섹스 같은 상업적이고 선정적인 키워드로 12개의 단편을 썼다. 게다가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유지 한다기 보다 오히려 범죄자에 가까운 인물이 화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픽션은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재미만 있으면 무얼 써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처음 받은 인상은 이 작가가 인기 좀 얻어 보자고 자살을 종용하거나 두 페이지마다 사람을 죽이는 글을 잔뜩 썼구나 싶었다. 재미있긴 했지만 이상하고 어쩐지 싫었다. 그리고 한동안 덮어두었다.



어느 날 감정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문득 김경욱의 소설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절벽을 찾아가 뛰어내리는 것을 목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게임이 있다. 죽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을 해치우기도 하면서 말이다.] 토니와 사이다가 자살여행을 떠난다는 단편의 한 구절이었다. 한 권을 모두 읽었을 때의 느낌과 다르게 낱장으로 몇 장 넘겨보자니 꽤나 신선한 구석이 있었다. 일단 그가 말하는 죽음이나 살인은 극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죽음이 아니라 스치기만 해도 죽어버리는 스턴트맨들의 허다한 죽음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화자는 있으되 그다지 주인공다운 인물도 없다. 이걸 발견하고, 모든 책이 교훈적이고 사색적이지 않다고 되새겼다. 쉽게 죽음을 말함으로 생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 같은 것도 찾을 수 없다. 그냥 허무하고 너무도 쉬울 뿐이다. 카프카는 우리는 신의 머리에 떠오른 허무주의적 사고들이자, 자살적 사고들이라고 했다. 행복은 충분히, 무한히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 나쁜 날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희망은 없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가끔 정말 그런가 싶을 때도 많다. 삶과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이 많아졌을 때, 문득 툭 내려놓는 기분으로 이 소설책을 읽는다.



이 책의 불량식품 같은 부분은 특히 인생을 게임에 비유하는 부분이다. 게임에서 본질적인 승리자는 게임 그 자체라고 정의한 다음 몇 장 뒤에 "당신을 게임에 참여시킬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패배자가 되어줄 용의가 있다." 라고 적극적으로 독자를 글에 끌어들이고 있다. 기분이 나쁘면서도 읽고 있다. 이런 책은 한권이면 족하다 싶다. 단편들 중 [Insert Coin]을 특히 여러 번 읽었다. '유혹'이라는 단어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한밤중에 한강대교 아치에 매달려서 '클리셰'를 외치는 사내를 상상해보라. 욕구, 욕망, 충동과 구별되며, 유혹이란 무를 향해 벌어진, 불길하게 째진 틈이라 한다. 그에 따르면 유혹이란 존재하려는 경향이 아니라 소멸하려는 경향 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얻지 못하는 허무함이 결국 삶의 유혹이며 , 그 잔인한 정체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있고 희망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사내는 "승부가 나지 않는 게임은 죄악입니다." 라고 한다. 뻔한, 이 게임의 목격자이자 참가자인 우리는 수없이 달아나지만 결국 다시 배팅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이 책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추천하고자 함이 아닌 자랑 싶어서다. 사적인 재미와 의미를 간직하고 책장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야말로 보물이지 않냐고 말하고 싶어서다. 다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 할 수 있는 범위가 좁지만 푼크툼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이 후기 역시 매우 편협하고 비전문적인 한 독자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