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해서 습작하고 있어요. 원작은 신요섭의 소설 [같은 경험]입니다.
연작이 될 것 같은데, 시작하고 진척이 없네요. 일단 1편.
[그녀에게]
1. 고백
무료한 하루를 보내던 토요일 오후 문득 철지난 잡지와 함께 쌓아 뒀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꺼냈다. 인간적인 고뇌와 나약함을 여지없이 그려냈기 때문에 좋아했던 이 소설이 같은 이유로 싫어졌다. 세월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짧은 한 때를 묵혀두었을 뿐인데 아주 낡은 물건처럼 너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검지로 천천히 책장을 몇 장 넘겼지만, 책을 집어든 순간부터 마지막 장에 신경이 쓰였다. 책장을 덮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아주 무거운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어지러운 사람처럼 바닥에 비스듬하게 쓰러져 눈을 감았다. 아무리 닦아도 피는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긴다. 그것이 누가 무엇을 위해 흘린 피인지 돌이켜 볼 때 , 내가 보았던 피는 한 마디로 요약 할 수 있다. ‘더럽다.’ 인간의 속셈에는 아무리 꾸미더라도 숨길 수 없는 비천함이 있다.
군대 동기였던 현진과 나는 전역 후 거의 2년을 함께 살았다. 그의 집은 내 자취방에서 그리 멀지 않았는데,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다며 자주 찾아와서 밤새 술을 마시거나 pc방에 가서 RPG 게임을 했다. 그러던 그가 아예 짐을 싸들고 들어와 10평 남짓의 좁은 방에 둘이 살게 된 것이다. 그 날은 책과 옷가지가 전부인 단출한 이사를 마친 다음 날이었다. 내가 조기 졸업을 한 후 지방에 직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현진은 2개 학기가 더 남아 그 집에 머물기로 했다. 전날까지 술을 진탕 마시고 잘 지내라, 잘 할 거다 떠들어대며 거창한 송별회를 하고 후일에 다시 보자며 인사까지 하고 내려온 터였다. 학교에 일이 있어 다시 올라 왔다가 막차 시간이 넉넉지 않아 못 보고 내려간다고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밝았다. 역까지 걸어가며 전날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너 없으면 이제 빈 집 따고 들어 와야겠네. 발로 대충 뻥뻥 차면 문 열어 주고 좋았는데. 야, 열쇠 줄 테니 매일 올라와서 방 열어놔.”
낄낄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내 열쇠고리에 열쇠를 하나 더 끼웠다. 이마며 목덜미까지 빨갛게 열이 오르도록 마셔 놓고도 정확하고 침착하게 걸어서 내 가방에 꽤 중요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하며 넣었다. 몇 번 도둑이 들어 열쇠만은 복사가 안 되는 좋은 것으로 바꿔 달았었다.
“딱 두개뿐이었지...”
가방 앞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 눈앞에 들어 보고 현진이 있을 자취방으로 향했다.
변변찮은 가구도 없는 작은 방, 거기엔 우리 둘 뿐이었다. 정확히 표현 하자면 방안에는 그 뿐이었고, 나는 아직 방문을 열고 서 있었다. 벽에 기대앉은 현진을 중심으로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그의 왼팔에서 검붉은 것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눈으로 물었다. 왜, 너는 지금 무슨 짓을 했냐고 목소리가 나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그의 창백한 얼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인아, 나 살....리지 마]
신발을 신은채로 달려들어서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목으로부터 튀어나오지 않는 소리를 온 몸이 대신한다는 듯이 손발이 따로 허둥대고 있었다. 수건으로 감싸 있는 힘껏 그의 왼팔을 쥐었다. 우리가 함께 지냈던 방이다. 네가 여기서 죽으면 남겨진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남은 생을 어떤 감정으로 살게 될지 생각해 봤는가. 이기적인 자식. 나쁜 자식. 머릿속으로 수백만 마디의 욕이 쏟아져 나왔지만, 몸은 그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손은 그의 팔을 움켜 쥔 채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죽으면 나도 끝일 것만 같았다.
“인아, 사랑해. 행...복했는데 혼자 남을 자신이 없었어.”
그는 울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지 몇 분 만에 구급대가 왔고, 능숙한 솜씨로 응급처치 한 후 그를 들것에 싣고 나갔다. 병원까지 함께 가야 했지만 나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꼼짝없이 무너져 내렸다. 옷이 그의 피로 더렵혀졌다. 옷뿐만 아니라 그 검붉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시각과 후각을 통해 교묘하게 내 안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 불과 몇 시간 전 통화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들떠 있었고, 바빠서 못보고 간다는 내 말에 묘한 안도감 같은 것도 실려 있었다. 바닥에는 정체불명의 약병도 몇 개 있었다. 손목을 긋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고작 준비한 것이 이런 꼬락서니라니. 아직 이유를 듣지 않았지만 그가 마지막에 꺼내놓고 간 말이 무한히 반복 재생되었다. 가감 없이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말과 그가 혼자 남기 싫었다는 말만 놓고 보자면 나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다. 나는 동성연애를 굉장히 혐오하는 축이고, 그에게서 단 한 번도 야릇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나에겐 교재중인 여자가 있고, 그 역시 이때까지 그의 마음을 아주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꼼짝 않고 앉아서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날이 밝았다.
“여보세요.”
“네, 제가 아는 건 어제 말씀드린 게 다에요.”
“네?”
“...”
현진의 부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가 병원으로 이송 중에 죽었다고 했다.
전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운 생명체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기억이 방을 가득 메웠다. 서정에 대한 기억이다. 1년 전에 그는 죽지 않았다. 1달 전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서정의 피도 현진의 피처럼 검붉었고 비린 냄새를 풍겼다. 갑자기 그가 너무나 그리워졌다. 나는 현진의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울기 시작했다. 울다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서정의 꿈을 꿨다. 말도 안돼.
2010.10.21 1:5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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