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스스하게 외로웠다. 짙은 빨간색 매니큐어를 새끼손톱에만 칠했다. 눈화장은 하지 않았다. 여주인공들의 눈물로 번진 마스카라는 슬픔과 섹시함을 더할 나위 없이 보여주지만 그들은 스크린 밖에서 살아간다. 앞서 걷는 여자의 검은색 하이힐 바닥이 보였다. 바닥은 검은 색이 아니라 빨간색 이었다. 문득 여자가 숨기지 않은 것은 발바닥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척 하며 실은 쉽게 일반화하는 말로 자기위안을 삼는다. 영화 같은 로맨스는 있을 수 있지만 영화 같은 베드신은 없다. 현실에서 영화 같은 일이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지하철을 탔다. 순환노선인 지하철을 첫차에 타서 막차에 내려 보고 싶었다. 오고가는 사람들로 붐비겠지. 아무에게도 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해 누군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단문들로 머릿속을 채웠던 어젯밤의 이야기다.
저녁 7시, 2호선 환승역이었다. 환승 안내 멘트가 나오자 문 쪽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나는 문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든 ‘동그란 것’에 마음을 뺏겼다.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만 잘 잡아주면 팔랑개비처럼 뱅글뱅글 돌 수 있을 것 같이 생겼다. 그 순간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하게 뭔가 요구하는 아이의 얼굴을. 나는 내 표정에 대해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곧장 사람들을 헤치고 내 앞으로 와서 아주 어린 아이를 대하는 어른 같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민 것을 덥석 받아 들고 눈을 떼지 않았다. 그것은 종이로 쫀쫀하게 짜여 비늘같이 이어져 있었다. ‘동그란 것’이 아니라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다시 그의 손이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동그란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았고, 긴 시간을 마주보고 있지도 않았다. 남자는 멋쩍은 표정을 짓고 그 환승역에서 내렸다. 그는 떠났고 나도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두 손으로 그의 ‘작품’을 꼭 감싸 쥐었다.
밤의 흔적이다. 눈을 뜨자 어제의 기억이 책상 위에서 아침햇살을 받고 있었다. 어젯밤 기다렸던 내일이 꼼꼼하고 견고하며 규칙적이게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파란색, 초록색, 흰색, 다시 파란색을 수놓았다. 내가 들고 내쉬는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팔을 뻗어 ‘동그란 것’을 가슴팍으로 가져왔다.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흔적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자면 냄비 받침뿐이 소용이 없겠다. 비닐 코팅된 종이란 냄비 받침으로도 부실하다. 그럼에도 나는 오랫동안 이 선물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유용성뿐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더 큰 의미에서 유용하다. 당신도 어느 외로운 날 예기치 못한 곳에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낯선 그가 내 눈빛을 읽고 다가와 손 내밀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의 호의를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감격스럽게 여길 만큼 감상에 젖어 있던 그 밤이 조금 우습다. 당장 유용하지 않은 것에 가치를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참 대단한 밤이었다. 이제 아침이다.
2010.09.25 AM 8:30

댓글 없음:
댓글 쓰기